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목호의 난 (문단 편집) === 공민왕의 반원 정책 === 공민왕 즉위 직전까지도 제주도에서 목호들은 강한 세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히키아게샤|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간섭기 만큼이나 제주에 살았던 시간도 길었고 제주에 살면서 제주 사람들과 혼인해 자식을 두기도 하는 등 반은 제주, 반은 몽골 혈통을 지닌 사람들도 많았고]], 이들은 자신들이 사는 제주도를 낙토(樂土)라고 불렀다고 한다.[* 원은 제주에 대해 상당히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제주에 목장을 설치한 것도 군사적인 목적 외에 제주를 방성(房星, 목축의 신)의 땅으로 여겼던 것도 있었고, 명나라와의 전황이 악화될 때는 원나라 황실의 보물들을 제주에 쌓아두거나 심지어 제주에 [[원혜종]]의 피난용 행궁을 지으려고까지 했다.] 또한 이들은 마침 고려에서 보낸 관리들의 수탈에 허덕이던 제주도민들을 교묘하게 선동해서 고려 조정에 반란을 일으키게 하는가 하면, 고려 조정에서 보낸 관리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고려 조정도 이들의 횡포에 분노했으나 원의 비호가 있었기에 어찌할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도 원이 쇠퇴하면서 달라졌다. 공민왕 4년([[1355년]])에 이르러, 원에서 [[장사성]] 등이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는데 실패한 사실이 귀환한 고려군에 의해 보고되고[* 이때 고려는 원의 요청으로 장사성을 진압할 원군을 보냈는데 여기에 최영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듬해 공민왕은 [[기황후]]의 오빠로 고려에서 위세를 부리던 [[기철]] 일파를 제거하고, 정동행성 이문소를 철폐하고 압록강 너머 8참과 동북면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는 등 반원 정책을 추진해 나갔는데, 제주에도 [[탐라만호부]] 소속 목호들이 기철 일파와 가담했다는 혐의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도순문사(都巡問使)[* 고려에서 도순문사는 도와 양계 외에는 제주에만 보내졌고, 이 직책의 이후 조선의 병마 절도사로 이어진다.] 윤시우를 보냈다. 이때 목호들은 반란을 일으켜 윤시우를 죽였지만 얼마 안 가서 다시 고려에 사신을 보내 사죄하는데, 이후 '''원나라 탐라만호부의 수장인 탐라만호의 인사권 자체가 고려에 넘어갔다.''' 제주의 탐라 만호는 한반도 육지부의 만호처럼 원의 관리가 아니라 이름 뿐인 군사 책임자에 불과했으며 아예 고려에서 온 제주목사가 만호를 겸임하는 경우도 생겼다. [[홍건적의 난]] 이후 원과의 연합 필요성을 느낀 고려가 반원정책을 일부 후퇴시키면서 탐라 목호들은 다시 기세가 등등해졌고, 공민왕 11년([[1362년]]) 8월에 목호 고독불화(古禿不花)[* 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와 동일인물인듯 하다.]와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가 탐라의 성주 [[고복수(탐라국)|고복수]](高福壽)를 끼고 반란을 일으켜 고려의 만호 박도손을 죽이고[* 고려사절요의 기록이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고려의 전 시중 윤환의 집 종이었던 김장로가 제주에 와서 만호 박도손을 때려 죽이고 시신을 바다에 던졌다고 되어 있다.] 10월에 본국인 원에 그들을 예속시켜 달라는 요청을 한다. 원에서는 목호들의 요청대로 부추(副樞) 문아단불화(文阿但不花)를 만호로 삼아 탐라에 보냈고, 이에 맞서 고려 조정은 12월에 밀직부사 유방계를 접반사로, 다시 성준덕을 제주목사로 임명해 제주로 보내 그들을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고려의 우려와는 달리 원에서 보내 온 만호 문아단불화는 공민왕 12년([[1363년]]) 6월에 아우 인부를 고려 육지부로 보내 말을 바치며, 자신들은 고려 조정에 거스를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공민왕 15년([[1366년]]) 10월에 고려의 전라도도순문사 김유가 선단 1백 척을 거느리고 목호 토벌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원에서 이를 문제삼자 고려 조정은 왜구 토벌 때문에 어쩌다 제주 해안에 닿았다가 목호와 충돌한 것 뿐이라고 잡아뗐다. 이를 계기로 탐라의 목호들은 원나라에 누차 탐라만호부 설치를 요청했지만, 공민왕 16년(1367년) 2월 계해(17일) 원나라에서 사신으로 온 고대비는 제주를 예전대로 고려 본국에 속하게 내버려 둘 것과 목사, 만호를 고려에서 보내고 목호들이 기르던 말도 전대로 원에 바치겠다고 제의한 고려 조정의 손을 들어주었고, 고려 조정에서는 제주에 안무사로 임박을 파견했다.[* 임박은 제주로 갈 때 제주에서 마실 물도 백성의 것이라며 함부로 마시지 않겠다고 육지에서 떠갔는데, 이러한 임박의 행동에 대해 청렴하다고 칭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주 물은 더러워서 입에도 대기 싫냐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임박은 목호의 난 이후 우왕이 즉위하고 1375년 4월에 [[이인임]] 등이 심왕의 고려 왕위 계승을 금지해달라는 글을 고려 관료들이 서명해 북원 중서성에 보내기로 한 것에 공민왕 때 이미 원과 단교했다는 이유로 서명을 반대했다가 역적으로 몰려 장을 맞고 객사했다.] 이에 대해서는 원에서 제주를 원나라 황제의 피난처로 점찍어 두고 있었기 때문으로,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명(明)이 흥기해 원을 위협하는 등 원에서 고려의 눈치를 살핀 것으로 볼 수 있다. 공민왕 18년([[1369년]]) 9월에 제주목사 박윤청이 임기를 마치고 제주를 떠날 때 탐라에서 원혜종의 피난용 궁전을 짓고 있던 원의 목수 [[원세]]를 개경의 [[노국대장공주]]의 영전을 짓기 위한 명목으로 육지부로 데리고 갔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